AI 서버용 수요 급증에 무라타 일부 품번 정리…다른 제품으로 생산능력 이동
무라타 주문지표 1.27, 2018년 공급난 초입 고점 1.25 웃돌아
삼성전기도 AI용 확대…범용 MLCC 공급 압박 확산 가능성
인공지능(AI) 서버가 고사양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생산능력을 빠르게 끌어가는 가운데 세계 1위 무라타제작소가 일부 제품을 정리하고 다른 제품으로 생산능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문은 출하를 앞서고 있다. 여기에 범용 제품까지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10년 전 MLCC 공급난과 비슷한 장면이 겹치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일본 전자부품업체 TDK는 MLCC 280개 품번의 생산 종료를 발표했다. 한 달 뒤 무라타도 대형 MLCC 2개 시리즈를 생산 목록에서 걷어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자장치가 늘어나는 전장화와 IT 기기 고사양화로 수요까지 빠르게 증가하면서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이어졌고, 2018년 MLCC 시장은 슈퍼사이클을 맞았다.
이번에는 AI가 먼저 움직였다. 고사양 MLCC 주문이 늘면서 업체들이 생산능력을 AI 서버용으로 옮기고 있고, 그 뒤를 무라타의 품번 정리가 잇고 있다. 출발점은 달라도 한정된 생산라인에서 고부가 제품의 몫이 커지고 범용 제품이 밀려나는 모습은 10년 전과 닮았다.
무라타 일부 제품 정리…AI가 당긴 생산라인
11일 업계에 따르면 무라타는 2026회계연도 제품군 최적화 계획에 따라 9개 시리즈(GRM·GRJ·GRT·GXM·GXT·GCM·GCJ·GCG·ZRA)에 속한 일부 품번의 생산을 단계적으로 종료한다.
9개 시리즈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제품과 일부 범용품 등을 대상으로 한 제품 교체다. 고객은 2027년 말까지 대체 제품으로 전환하거나 필요한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최종 주문은 2028년 3월31일, 마지막 출하는 2029년 3월31일이다.
무라타는 해당 품번을 정리해 다른 제품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지난해에도 GRM·GRT·GJ8·ZRA 일부 품번을 대상으로 비슷한 조정을 했다. 오래된 제품 몇 개를 없애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정된 생산라인에서 무엇을 더 만들 것인지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는 과정이다.
지금 그 우선순위의 앞쪽에는 AI가 있다. 삼성전기에 따르면 AI 서버 한 대에는 일반 서버보다 10배 이상 많은 MLCC가 들어간다.
나카지마 노리오 무라타 사장도 일본 EE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AI 관련 수요가 크게 늘면서 MLCC 공급이 상당히 빠듯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무라타는 실제 수요를 다시 점검하면서 증산 투자도 이어갈 계획이다.
주문 속도도 가파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6월 말 무라타와 삼성전기, 타이요유덴의 수주출하비율(BB ratio)은 각각 1.30, 1.31, 1.25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BB율이 1을 넘으면 출하하는 물량보다 새로 들어오는 주문이 많다는 뜻이다.
무라타의 주문 관련 지표는 1.27까지 올라왔다. 트렌드포스가 비교한 2018년 MLCC 공급난 초입의 고점 1.25보다 높다.
생산량 자체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무라타·삼성전기·타이요유덴의 MLCC 출하량은 최근 5년 만의 월간 최고 수준까지 올라왔다. 문제는 어디에 생산능력을 쓰느냐다. 일본과 한국 업체들이 소비자용 제품에서 AI 서버용 고사양 제품으로 생산라인을 옮기면서 일부 범용 제품의 공급이 빠듯해지고 있다.
10년 전엔 전장發 공급난…이번엔 범용품까지 압박
2016년에도 주요 업체들은 생산라인을 재편했다. TDK가 280개 품번을 정리한 데 이어 무라타가 GRM43·GRM55 시리즈 생산을 끝냈다.
그 사이 자동차에 전자장치가 많아지면서 차량 한 대에 필요한 MLCC 수가 늘었고 스마트폰 등 IT 기기의 고사양화도 이어졌다. 수요가 커지는 동안 공급업체들은 제품군을 재편했다. 범용 제품까지 물량이 부족해졌고 2018년에는 가격 인상이 본격화됐다.
2026년에는 순서가 조금 다르다. AI 서버용 고사양 MLCC 주문이 먼저 몰렸고 업체들이 생산능력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8월부터 일부 MLCC 가격을 조정했고 타이요유덴에서도 가격 인상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와중에 무라타가 일부 품번을 생산 목록에서 빼기로 했다.
세계 2위 삼성전기도 AI 쪽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 지난 1일 글로벌 대형기업과 1조722억원 규모의 AI 서버용 MLCC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했다. 2027년 한 해 공급분으로 삼성전기가 맺은 MLCC 장기공급계약 가운데 역대 최대다.
무라타가 비운 자리를 삼성전기가 그대로 채운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성전기 역시 같은 생산능력을 놓고 범용 제품과 AI 서버용 고부가 제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변화는 범용 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다. 세계 1·2위 업체가 고부가 제품에 생산능력을 더 배분할수록 범용 제품에 돌아갈 몫은 줄어든다. 일본과 한국 업체가 줄인 물량을 대만·중국 업체가 가져가는 과정에서 가격과 시장점유율도 함께 움직일 수 있다.
10년 전과 지금이 똑같지는 않다. 당시 생산라인을 끌어당긴 건 자동차 전장화와 IT 기기 고사양화였고 지금은 AI 데이터센터다. 다만 잘 팔리는 제품에 생산능력이 먼저 배분되면서 다른 제품의 공급이 빠듯해지는 과정은 닮았다. 무라타까지 품번 정리에 나서면서 이 흐름은 범용 MLCC 시장으로 번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