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정 이어 최태원도 협력 가능성 언급…R&D·공급망·생산까지
2018년 3950억엔 투자…경쟁하면서 D램 공급·MRAM 공동연구
키옥시아·샌디스크 25년 생산동맹…AI 메모리 증설 속 협력 주목
SK海力士(000660)가 8년 전 시작한 일본 키옥시아 투자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약 4조원을 들여 일본 낸드플래시 경쟁사에 투자한 뒤 자본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SK그룹 최고경영진이 잇달아 키옥시아와의 사업 협력을 언급하면서 관계의 무게중심이 달라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곽노정 SK海力士 사장이 지난달 27일 키옥시아와 낸드 시장을 함께 발전시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연구개발(R&D)과 공급망 공유, 공동생산까지 협력 범위를 넓혀 언급했다.
최 회장은 2일 공개된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키옥시아의 미래 전략에 SK海力士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언제든 파트너가 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어렵다면 투자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뜻도 밝혔다.
당장 키옥시아와 합작공장을 짓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SK海力士는 공동생산이 아사히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일 뿐 구체적인 생산계획을 밝힌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투자 종료 역시 특정 계획이 아니라 시너지와 협력을 전제로 한다는 일반적인 투자 원칙이라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8년 된 투자 관계가 다시 거론되는 시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SK海力士는 한국 밖 생산거점까지 검토하고 있다. 키옥시아 역시 기존 파트너인 샌디스크와 일본에서 대규모 증설을 추진 중이다.
경쟁하면서 투자하고 공급도…8년간 얽힌 관계
두 회사의 인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K海力士는 베인캐피털이 주도한 컨소시엄을 통해 당시 도시바 메모리 사업 인수에 총 3950억엔을 투자했다. 도시바메모리는 이듬해 키옥시아로 이름을 바꿨다.
최근에는 지분 구조도 달라졌다. 도시바가 보유 지분을 줄이면서 SK海力士가 전환사채(CB)를 보유한 베인캐피털 계열 특수목적회사(SPC) 'BCPE 판게아 케이만2'가 키옥시아 지분 약 14%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다만 SK海力士가 키옥시아의 최대주주가 된 것은 아니다. SK海力士는 보유 CB를 SPC의 의결권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아직 행사하지 않았다. 키옥시아 동의 없이 2028년까지 의결권 15%를 초과해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 약정도 있다.
사업 관계는 더 복잡하다. 낸드 시장에서는 경쟁하지만 SK海力士는 키옥시아에 D램을 공급하고 있다. 자기저항메모리(MRAM) 분야에서는 공동 연구개발도 진행 중이다.
키옥시아 측도 아사히신문에 "SK海力士와 MRAM 연구개발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SK海力士는 D램 공급사 중 하나"라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자본 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키옥시아는 공시자료에서 SK海力士를 경쟁사로 명시하고 있다. CB 전환 이후 SK海力士가 행사하는 의결권이 일반주주의 이해와 다를 가능성도 위험요인으로 제시했다. 협력 확대와 이해관계 조율을 동시에 풀어야 하는 구조다.
이런 가운데 곽 사장은 지난달 27일 키옥시아 지분 활용 방안에 대해 정해진 계획은 없다면서도 낸드 시장을 함께 발전시킬 방안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닷새 뒤 최 회장의 발언에서는 R&D와 공급망을 넘어 생산까지 협력의 범위가 넓어졌다.
키옥시아는 이미 5조엔 증설…옆에는 샌디스크
생산 협력에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키옥시아에는 이미 25년 넘게 플래시메모리를 함께 개발·생산해온 미국 샌디스크가 있다.
두 회사는 일본 욧카이치와 기타카미를 중심으로 생산 기반을 공유해왔다. 지난 25년간 일본에 공동 투자한 금액만 약 9조엔(500억달러 이상)이다.
지난달 27일에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전제로 2032년까지 5조엔(310억달러 이상)을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욧카이치와 기타카미 생산시설과 관련 인프라, 차세대 기술 개발에 투입할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곽 사장이 키옥시아와 낸드 시장을 함께 발전시킬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닷새 뒤에는 최 회장이 생산 협력까지 언급했다. 키옥시아가 기존 파트너와 대규모 증설에 나선 시점에 SK 측에서도 협력 메시지가 잇따라 나온 셈이다.
배경에는 AI발 메모리 수요가 있다. 최 회장은 아사히 인터뷰에서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半导体 공급이 수요보다 20~30%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한국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투자만으로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일본을 포함한 해외 생산기지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에는 半导体 장비와 소재·부품 업체가 밀집해 있고 정부도 자국 내 半导体 생산시설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일본을 리스크와 문화 측면에서 매력적인 후보지로 평가했다. SK는 일본 여러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장 유치 제안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키옥시아와의 공동생산이나 일본 공장 건설은 아직 구체화된 계획이 아니다. 더구나 키옥시아에는 샌디스크라는 오랜 생산 파트너가 있다. SK海力士가 생산 협력에 참여하려면 기존 생산체계와의 역할 조정도 불가피하다.
2018년 키옥시아 투자는 경쟁사에 대규모 자금을 넣은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8년이 흐르면서 두 회사는 낸드에서 경쟁하는 동시에 자본과 공급, 연구개발로 얽힌 관계가 됐다. 이제 SK海力士가 이 관계를 실제 생산 협력까지 넓힐지, 투자 관계에 머물지가 다음 수순이다.






